집에 오자마자 TV를 켜는 이유는 고요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TV를 켜고, 밥을 먹거나 씻는 동안에도 소리를 남겨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즐기기 위한 시청이라면 보고 싶은 내용이 끝났을 때 끌 수 있습니다. 끄는 순간 불편해져 다시 켠다면, 그 TV는 보려고 켠 것이 아닙니다. 조용해지면 마음속에서 괴로운 것이 올라오는데,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켜 둔 것입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없어도 켜 둔 TV 소리는 무엇을 덮어줄까요?

TV 소리는 조용할 때 올라오는 외로움과 걱정을 덮어줍니다. 소리가 나는 동안에는 내가 외롭다는 것도, 무엇이 걱정인지도 알아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TV는 버튼 한 번이면 켜지니, 당장의 불편을 줄이려고 가장 손쉽게 찾는 방법이 된 것입니다.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생길까요?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 사람과 이어져 있지 못해서 생깁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내 말을 기억해주거나 기분을 물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외로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혼자 있어도 필요할 때 연락할 사람이 있고 관계가 이어진다는 믿음이 있으면 견딜 만합니다.

TV 속 인물은 계속 말하지만 이 방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TV 소리는 조용한 방은 채워도, 내 말을 기억해 주고 기분을 물어 줄 사람이 필요한 마음은 채우지 못합니다. 몇 시간을 본 뒤에도 외로움이 그대로인 이유입니다.

사람보다 화면이 더 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대의 말을 듣고, 지난 이야기를 기억하고, 거절당할 가능성을 견뎌야 합니다. 대화가 서툴면 어색한 침묵과 실수를 여러 번 겪어야 조금씩 익숙해집니다.

TV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내가 끌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받을 위험은 적지만 관계를 연습할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을 피해 화면 앞에 있을수록 실제 대화는 더 낯설어지고, 대화가 낯설수록 다시 화면을 찾게 되는 일이 되풀이됩니다.

TV를 무조건 끊기보다, 켜기 전에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요?

습관을 없애겠다고 갑자기 모든 화면을 끄면, 그동안 감당하기 힘들어 TV 소리로 덮어 두었던 외로움과 걱정이 한꺼번에 올라올 수 있습니다. 먼저 리모컨을 누르기 전 삼 분만 앉아 지금 떠오르는 생각과 기분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아무와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해 외롭다’, ‘내일 일이 걱정된다’처럼 지금 마음을 한 문장으로 말해 본 뒤 TV를 켜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할 틈도 없이 TV로 피하던 감정을 켜기 전에 한 번 알아차렸다는 점입니다. 그래야 내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외롭거나 걱정이 되어서 TV를 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V 소리를 줄인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TV를 한 시간 덜 보는 것만으로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안부 메시지 한 통을 보내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만들고, 짧더라도 서로의 근황을 묻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휴식으로 보는 TV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과 할 일, 사람 만나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면서도 TV를 끄지 못하고, 우울과 불안도 심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목표는 조용한 시간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할 때 알아차린 외로움을 TV 소리로 덮어 두지 않고, 안부를 묻고 사람을 만나면서 달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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