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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엎드려질 때

    중독에서 회복하려는 사람들이 한 단계씩 밟아 가는 12단계 프로그램에 항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말을 처음 듣는 분들은 대개 포기를 떠올립니다. 손을 들고 주저앉는 것, 이제 나는 틀렸다고 인정하고 손을 놓는 것. 그런데 둘은 다릅니다. 「나는 안 된다」고 인정하는 것은 같아 보여도, 포기는 거기서 끝나고, 항복하면 거기서 새로운 시작이 일어납니다.

    자아가 셀프 앞에 죽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자아는 셀프(self) 앞에 죽어야 합니다. 심리학자 융의 이론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자아는 「이렇게 살아 봐야지, 저렇게 살아 봐야지」 하며 내 방식대로 삶을 끌고 가는 나입니다. 셀프는 내가 알고 있는 나뿐 아니라 내가 미처 모르는 마음까지 다 합친, 전체인 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자아는 계속 살아 있습니다. 부분인 자아가 전체인 나를 제쳐 놓고,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말은 나를 없애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인이라고 우기던 자아가 주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엎드려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자아입니다.

    12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어디일까요?

    12단계의 첫 단계, 곧 1단계는 내가 중독에 무력했고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고백하는 단계입니다. 주인이라고 우기던 자아,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작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12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꼽으라면 1단계입니다. 1단계를 거치지 못하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의미가 없고, 1단계 하나만 제대로 거쳐도 그 사람의 중독 문제는 거의 반은 해결된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말은 자기를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정되는 것은 내 존재가 아니라, 중독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상담이 생전 처음인 사람은 무엇을 깨닫고 찾아왔을까요?

    대마를 한 분이 저에게 상담을 받으러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상담이 생전 처음인데, 이미 1단계를 거치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이 대마가 나를 망쳤고, 내가 얘를 끊어내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끊어내지 못하면 내 삶이 망가지는구나.」 그러고는 검찰에 가서 자수서를 쓰고, 부모에게 다 이야기하고 아내에게 고백했습니다.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걸 못 끊으면 내가 죽겠구나 싶었는데, 자기 힘으로는 못 끊을 것 같으니까 다 털어놓은 것입니다.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모르지만, 감옥 갈 준비를 하고 마음을 정하고 온 것입니다.

    구원자 같던 대마는 그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분은 대마를 정말 구원자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못하게 하느냐 싶었고, 그래서 많이 했습니다. 맨 처음에는 반짝하고 편안함을 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복하다 보면 눈이 풀립니다. 사람이 딱 봤을 때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둘로 갈라진 것처럼, 필 때는 되게 좋은 사람이고 안 필 때는 짜증을 내고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 됩니다. 가족들도 이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몰랐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엎드려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러다 그분은 자기 힘으로는 대마를 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엎드려진 것입니다. 검찰에 가서 자수서를 쓰고 부모와 아내에게 고백한 것이 바로 그렇게 엎드린 것입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세입니다. 이렇게 엎드려질 때 사실 새로운 시작이 일어납니다.

    왜 「맡겼다」가 아니라 「맡기기로 결정했다」일까요?

    12단계의 3단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게 된 대로 그 신의 보살핌에 우리의 의지와 생명을 완전히 맡기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신은 저마다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입니다. 중독에서 회복하는 사람들이 12단계를 한 단계씩 풀어 쓴 해설이 있습니다. 이 해설은 사람마다 자기가 이해하게 된 대로의 신을 믿을 권리가 있고, 종교가 없어도 누구나 이 단계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장을 뜯어보면 「맡겼다」가 아닙니다. 「맡기기로 결정했다」입니다. 해설은 이 차이를, 누가 대신 결정해 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중독에 빠진 사람은 그전까지 자기 의지와 생명을 중독의 파괴적인 힘에 맡겨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3단계의 결정은 중독에 빠진 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내린 결정입니다. 그리고 결정한다는 말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맡기기로 결정하면 그걸로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해설은, 맡기겠다고 해 놓고도 실제로는 여전히 의지와 생명을 내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결정을 온전히 하지 못했을 때, 회복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신께 나아가 보살펴 달라고 청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신께 보호를 청하는 단순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항복은 포기와 무엇이 다를까요?

    해설은 3단계를 설명하면서 항복이라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고는 바로 이어서, 더 이상 두려움이나 분노, 죄책감과 자기연민, 우울과 싸우지 않는다고 씁니다. 해설이 말하는 항복은 이런 것들과 싸우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신을 따라가는 동안, 가망이 없어 보이던 무력한 절망감에서 점차 헤어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1단계에서 중독에 무력했다고 인정한 사람이, 무력한 절망감에서는 오히려 헤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포기한 사람은 「안 된다」 하고 손을 놓은 채 주저앉습니다. 항복한 사람은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엎드려진 다음, 중독에 빠진 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본 그분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는데 제 발로 검찰에 가서 자수서를 썼습니다. 포기한 사람은 자수서를 쓰지 않습니다.

  • 자기 몸을 파괴해서까지 인정을 받고 싶은 거죠

    인정을 얻는 방식은 두 갈래로 갈립니다. 한 갈래는 외도입니다. 외도하는 남자는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 여자가 자기에게 넘어오는 것으로 남자로서 인정받는 느낌을 얻습니다. 다른 한 갈래는 자기를 엄청 희생해서까지 남을 도와 인정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정반대인데, 둘 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옵니다.

    외도하는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며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외도라고 하면 먼저 성적인 욕구 쪽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성적인 욕구는 본질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부분은 정서예요. 외로움, 공허감, 인정받음, 이런 정서적인 부분들이 채워지면 남자든 여자든 딴 데 눈 안 팝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외도하는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 얻고 싶은 것은 자기 능력을 인정받는 느낌입니다. 내가 남자로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느낌이요. 모르는 여자를 꼬셔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이 남자 마음 안에서는 내가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여자가 넘어왔으니 내가 남자로서 인정받는구나, 하는 거죠. 이 인정받는 느낌을 얻는 데 이용되는 것이 성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이 마음은 상당히 강합니다.

    아버지를 확 비난하던 아들에게 왜 외도가 대물림될까요?

    남자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역할을 보고 자랍니다. 아버지가 바람을 폈다, 외도를 했다면, 아들로서 아버지를 확 비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커서 가정을 꾸리고 자기가 아버지 역할을 딱 하게 되는 순간에, 아버지가 했던 그 외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또 어떤 분은 우리 아빠가 그렇게 바람을 피웠으니 나는 죽어도 안 할 거야, 하고 딱 안 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분의 아들 대에 가서 바람을 핍니다. 아버지의 외도로 받은 상처가 치유 받아서 바람을 안 피우면 되는데, 이분은 상처는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안 피우겠다고 결단만 한 거예요. 그러면 이분은 안 피워도 이분의 아들이 피우게 됩니다. 치유되지 않은 아픔은 이런 식으로 가족 안에서 대를 이어 내려갑니다.

    아내에게 어떠한 잘못이 없는데도 외도를 하는 남편들이 있는 반면에, 아내 때문에 외도할 만한 이유가 충분한데도 외도하지 않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자기 성품과 성깔 때문에 남편을 힘들게 하는 아내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들이 다 바람피우는 건 아니거든요. 외도는 아내 탓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거죠.

    못 도와줘서 미치는 병, 동반의존은 어떤 병일까요?

    다른 갈래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동반의존이라는 병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동반의존은 누구를 도와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병이에요. 못 도와줘서 미치는 병입니다. 남을 못 도와주면 견디지를 못해요. 그래서 자기를 엄청 희생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돕는 데 몰입을 하고, 그다음에 자기는 남는 게 없죠. 자기를 그렇게까지 희생시키니, 기본적으로 동반의존은 자기 학대적 병입니다.

    목회자도 본인도 모르는 이 병은 교회에서 어떻게 보일까요?

    자기 학대적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사용해먹을 수 있겠죠. 겉으로는 막 신앙이 좋은 것 같고 희생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병이라는 거예요. 누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목회자도, 그 일을 하는 본인도 이게 병인 줄 모릅니다. 목회자는 시켜 먹고, 본인은 시키는 일을 합니다.

    인정 중독자들은 왜 자기 몸을 파괴해서까지 희생할까요?

    그러면 왜 그렇게 희생할까요. 인정받으려고요. 그래서 동반의존인 사람들을 다른 말로 인정 중독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인정에 중독됐으니까 자기 몸을 파괴해서까지도 인정을 받고 싶은 거죠.

    인정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자기가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적 가치성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냥 있는 것만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다고 자기를 정해 놓은 거예요. 그러면 남는 길은 행위밖에 없어요. 그래서 희생하고 돕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 존재도 괜찮다, 가치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얻고 싶어 하는 거죠.

    그런 희생과 헌신을 하지 않고 있으면, 내가 여기 있어도 된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존재적 허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고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하면서 뭔가 할 일을 쫓아서 찾아다니게 됩니다.

    중독자와 그 아내는 어째서 환상의 콤비가 될까요?

    대개 술이나 약물 같은 것에 중독된 남편과 사는 아내들을 동반의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둘이 너무 환상의 콤비거든요. 중독자는 계속 자기를 돌봐 달라는 삶으로 살고, 동반의존인 아내는 그래 내가 너를 돌봐 주마 하고 계속 삽니다. 돌봐 달라는 사람과 돌봐 주고 싶은 사람이 만났으니 서로 딱 맞는 거죠.

    중독자가 회복하려 할 때, 동반의존인 아내는 무엇을 할까요?

    그런데 중독자가 이 관계를 깨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이제 어른으로서 내 삶을 책임지며 살아갈 거야, 하고 회복의 길로 갑니다. 그러면 동반의존인 아내는 어떻게 되겠어요. 겁나죠. 내가 도와줘야 될 대상이 사라지네, 하고요.

    그래서 이 중독자가 회복되려고 할 때 뒤통수를 한 대 칩니다. 다시 넘어지게요. 상대가 중독자로 남아 있어야 자기가 도울 수 있으니까요. 이래서 결국은 회복을 못 하게 만들어요. 회복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상 보면 그 회복을 망가뜨리는 거예요.

  • 내가 당했다, 이 느낌으로 가져와요

    어릴 때 부모에게 좋은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두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꼭 엄마가 무서웠다거나 아빠가 무서웠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좋은 돌봄을 받지 못하면 그것만으로 두려움이 남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삭막해지면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요?

    돌봄을 못 받아 두려움이 남으면, 그 사람에게 세상은 삭막한 곳이 됩니다. 세상이 삭막해지면 사람은 어떤 자세를 취할까요. 전쟁이 난 나라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전쟁이 나면 모든 사람이 편집적 상태, 곧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서로 의심하고, 자기가 안 당하려고 방어 태세를 취하고, 질서도 법도 무너집니다.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남은 사람도 이처럼 세상을 의심하고, 자기가 안 당하려고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바로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나빠서 범죄자가 되는 게 아니에요. 두려움 속에서 자기가 살아나가려고 애쓰는 거예요. 그렇게 애쓰는 절규의 모습들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두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두렵게 만들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당했다’고 느낀 사람은 커서 어떻게 될까요?

    두려움을 겪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은, 두려운 환경에 놓였던 일 자체를 ‘내가 당했다’, 이 느낌으로 가져오기 때문이에요. 마음에 ‘내가 당했다’는 느낌이 남는 거예요. 좋은 돌봄을 못 받은 것도 그 자체로 두려운 환경에 놓인 것이니, 이때도 이 느낌이 남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경험을 반복합니다. 좋든 나쁘든 반복돼요. ‘내가 당했다’는 그 경험도 반복되는데, 자기가 커서 힘이 생겼을 때는 다른 사람을 두렵게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두려움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이런 면이 많이 발달해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굉장히 두렵게 만듭니다.

    술에 취해 건 전화 한 통이 왜 오싹할 만큼 무서웠을까요?

    이런 사례가 있었어요. 알코올 중독인 사람인데, 술에 딱 취하면 여자들에게만 전화를 합니다. 남자들에게는 잘 안 해요. 그런데 그 전화를 받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오싹할 정도의 공포입니다. 말만 놓고 보면 일반적인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이 사람이 올까 봐 무서워할 정도예요. 사람은 그 정도로 강렬하게 상대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렸을 때 그 두려움을 그만큼 많이 받아온 사람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려움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커서 남을 두렵게 하는 면이 많이 발달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의도를 갖고 겁을 주는 걸까요?

    이 사람은 의도성을 갖고 두려움을 주지 않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겁줘야겠다고 마음먹고 하는 게 아니에요. 어릴 때의 경험이 다시 반복될 때는 무의식적으로, 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그저 자기를 표현한다고 하는 건데, 그것이 다른 사람을 겁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폭력과 파괴가 사실은 어릴 때 두려웠던 그 경험에서 나옵니다.

    빼앗긴 사람에게 되찾아 오는 일은 어떻게 느껴질까요?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 말고도 있었던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박탈입니다. 박탈은 단어 뜻 그대로, 어릴 때 처음에는 주어졌던 것을 그다음에 빼앗긴 것입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에 되찾아 오려는 마음이 아주 강하게 생깁니다. 내가 빼앗겼으니까 되찾아 와야 되지 않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이 되찾아 오는 과정이 도둑질이 되기도 합니다. 속으로는 ‘내가 잃어버렸으니까, 내가 이것을 가져도 돼’ 하기 때문이에요. 또 원래 있어야 할 것을 잃어버렸으니, 마음속에 그만큼 빈 공간이 생깁니다. 사람은 그 빈 곳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빈 곳을 채우려는 이 마음에 욕심도 같이 자극이 됩니다. 그래서 빈 곳을 채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이 가져가려고 해요.

    이렇게 가져가는 일은, 밖에서 보면 명백히 남을 침범하는 것이고 폭력입니다. 그런데 박탈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정당하다고, 당연하다고 느껴집니다.

    편도체 알람이 울리면 왜 좋은 말도 안 들어올까요?

    다시 두려움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온을 가져라, 여유를 가져라’ 하잖아요.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사람은 공격적이지 않게 되거든요. 두려움이 이 여유를 어떻게 없애는지는 우리 뇌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뇌 한가운데에 있는 편도체가 두려움 신호를 울리는 알람이거든요. 이 알람이 울리면 ‘지금 주변이 위험하니 빨리 공격을 하든지 도망을 치든지 아니면 꼼짝 말고 있든지 선택해라’ 하고 우리 몸을 각성시킵니다. 몸이 위험에 대비해 바짝 긴장한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 각성 상태가 되면 여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말도 우리에게 안 들어와요. 어떠한 좋은 말도 안 들어옵니다. 이 상태에 있으면 부부가 대화를 할 때도, 누가 나를 비난할 때도, 그 사람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면 받아칠 생각만 합니다.

    비난을 들으면 받아칠 생각만 드는 것은 병일까요?

    비난을 들으면 받아칠 생각만 드는 것, 이것은 병이 아닙니다. 그게 그냥 인간의 정상적인 모습이에요. 편도체 알람이 울리면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비난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서로가 소통이 됩니다. 말에는 말투나 분위기로 전해지는 파장이 있습니다.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공격적인 파장이 나가면, 상대는 그것을 딱 감지하고 일단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 작은 지혜로는 인생이 풀리지가 않거든요

    사람을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나라고 하는 이 나는 무엇일까요. 흙이 아니라 생기입니다. 자아는 진흙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문제는 진흙인 이 자아가 마치 자기가 셀프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비유는 사람이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값진 것이 있다는 쪽이 아니라, 그 값진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느냐는 쪽을 가리킵니다. 셀프가 어떤 자리인지는 「엄마 자리를 하나님으로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에 썼습니다. 여기서는 그 자리를 진흙이 차지하고 앉았을 때 삶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봅니다.

    어른이 되면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아가 셀프를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셀프를 만나면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신, 삶, 인생, 자연 앞에 마음이 겸손해지고 겸허해지는 이 겸손의 단계에 이르는 것, 그게 어른입니다.

    흐름을 무시하면 분노가 남습니다

    고개를 숙이지 못한 사람은 반대로 갑니다. 삶이라고 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거대한 흐름들이 있는데 그 흐름을 무시해요. 내가 원할 때 결혼해야 되고, 내가 원할 때 밥 먹어야 되고, 내가 원할 때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화가 나죠. 많은 성인들이 분노와 증오와 우울함을 안고 사는 자리가 여기예요.

    여기서 자아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내가 신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자아거든요. 그러니 셀프를 들여다볼 이유가 없습니다. 묻지 않고, 접촉하려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이게 이제 율법이에요」

    자아는 자기 방식대로 삽니다. 이렇게 살아봐야지, 저렇게 살아봐야지 하면서요.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신앙생활이 좋은 거야, 저렇게 해야 신앙이 좋은 거야. 알고 보면 다 자아의 방식대로 자기를 끌고 온 겁니다.

    열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분들이 있어요. 신앙생활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자기 안에서 셀프와 접촉이 안 됩니다. 셀프와 접촉이 안 됐다는 것은 자기 안의 지혜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 자리를 자아의 개념이 채웁니다. 이렇게 살아야 옳은 사람이고 이렇게 살아야 거룩한 사람이다. 이게 이제 율법입니다. 세상이 가르쳐 준 그것을 잘 지켜야 자기가 빛나고 잘나고 거룩해진다는 거예요.

    그럴듯하게 뭔가 되는 것 같은데

    자아는 현실의 기능을 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방식으로 끌고 가도 어느 정도 그럴듯해요. 뭔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안 됩니다. 계속 넘어져요.

    재발하고 넘어지고 반복됩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같은 상황이 발생하죠(「나는 왜 늘 결정적인 순간에 걸려 넘어질까」).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고, 신앙심도 좋아지려고 했고, 거룩하게 살려고 했는데 또 안 됩니다. 그렇게 막 살아봤지만 자기 내면의 진정한 자유는 생기지 않아요.

    작은 지혜와 큰 지혜

    회복 프로그램의 첫 고백이 내가 중독에 무력했고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자원이 고갈됐다는 말이에요.

    결국 삶에 부딪힙니다. 내 지혜로 살아봤는데 이게 풀어질 수가 없어요. 삶의 고단함, 풀리지 않는 그 일들은 인간적 지혜로 풀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 자체가 단편적이고 굉장히 편협하거든요. 그 안에서 그나마 살아보려고 버둥거리면서 만들어 낸 것이 작은 지혜예요. 큰 지혜를 가지고 풀어야 인생을 풀어가지, 작은 지혜로는 인생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큰 지혜는 참 셀프가 알려주는 그 지혜예요.

    뺨을 한 대 맞았는데

    그러면 그 작은 지혜는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요.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계산으로 생겼습니다.

    저는 성경이 역설적이라고 자주 말합니다. 무엇과 역설적이냐 하면 인간의 생각과 역설적이에요. 사람은 이렇게 해야 나한테 이익이겠다,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경은 대부분 반대로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이렇게 해야 이익이 있다고요. 희생해라, 주라, 용서하라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인간 세상으로는 용서하는 게 내가 손해보는 일이거든요. 뺨을 한 대 맞았는데 용서하라고 합니다. 내가 용서해 버리면 내가 한 대 못 때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건 손해보는 일인데 용서하라고 그래요. 그런데 용서가 나한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거죠.

    유익한 길을 손해로 계산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우리가 나한테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방식들이 나한테 해를 가져옵니다.

    상담 자리에서 안내받는 길도 그렇습니다. 다 유익하고 행복해지는 길일 텐데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아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을 하지 않는 거예요. 육신의 생각으로는 그 손해본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유익을 몰라서도 아니고, 무엇을 믿느냐가 달라서도 아닙니다. 계산이 먼저 답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가지고 계속 바둥바둥 걸으면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 사실은 대부분이죠. 참 자유와 참 진리를 맛보지 못하고, 나름 노력하면서 살다가 가는 거예요. 그런데 중독이 되어서, 상처가 있어서 그걸 해결해 보려다가 오히려 참 진리를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면서 더 깊이 깊이 찾다가요. 그래서 그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지나야 하는 대목이 있어요. 자아가 가지고 있던 자기 삶의 방식을 두고 정말 똥이었구나,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틀렸구나 하고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진흙이 진흙 자리로 내려앉는 일이에요.

  • 그 소리가 안 들리니까,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중독은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마음이 어렵고 힘들 때 술이나 약으로 위안을 받기 시작하면, 그게 반복되고, 심해지면 중독자가 되는 거예요. 그럼 고려해 봐야 될 게 있어요. 마음의 고통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걸까.

    마음의 고통이 없는 사람도 중독자가 될 수 있을까요?

    마음의 고통이 없는 사람이 중독자가 될 순 없어요. 중독은 그 목적이 자기를 진정시키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이 평안한 사람은 진정시킬 그 무엇이 필요하지 않은 거죠.

    마음의 고통은 근원적으로 어디서 오나요?

    제가 마음의 고통의 원인을 세밀하게 찾아봤더니, 그 근원적 원인은 자기가 자기를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너는 쓰레기야.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너는 멍청한 놈. 바보 같은 놈. 자기가 자기를 이렇게 정의 내렸고, 자기의 정체성을 그렇게 정해 놓은 겁니다.

    내가 나를 바보라고 여기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바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게 의식이 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의식 자체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의식이 되든 안 되든, 내가 나를 바보라고 여기면 기분이 어떨까요. 우울해요. 그리고 항상 긴장해요. 왜 긴장하냐면,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여기면 어떡하지 싶은 거예요. 남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들 있죠. 다른 사람의 평판과 평가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런 믿음, 이런 생각이 있어요. 너는 형편없는 놈. 넌 바보 같아. 누가 너를 좋아하겠니.

    「넌 바보야」, 이 소리는 얼마나 자주 반복되나요?

    제가 20여 년 동안 상담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서 얻은 결론이 있어요. 나는 바보 같다는 생각이 한번 들었다고 해서, 그게 호주머니에 들어가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 반복됩니다. 계속 자기한테 이 메시지를 심어요. 스스로가요.

    넌 바보야. 넌 바보야. 넌 바보야. 이러고 있어요. 그런데 이러고 있는지 본인이 인지를 못해. 바보 같으니까 이런 것도 못하고, 바보 같으니까 넌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바보 같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널 좋아하겠냐. 모든 인생의 시간 시간, 순간 순간마다 계속 이러고 있어요.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롭겠어요.

    술 한잔 딱 마시면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런데요. 술 한잔 딱 마시잖아요. 마약을 한번 딱 넣었어. 그러면 우리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너 바보야, 이 멍청아. 이 소리가 안 들려요.

    그 소리가 안 들리니까 어떻게 중독에 안 빠질 수 있겠어요. 일순간 자기를 구원시켜 주잖아요. 자기를 더 이상 바보라고 말하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어떻게 그걸 안 선택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선택하는 거예요.

    중독자는 즐거워서 술을 마시는 걸까요?

    중독자가 술을 마시는 건 즐거워서가 아니에요.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중독자에게 술은, 사실은 자기가 너무 괴로우니까 이 괴로움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도피처가 돼버린 거죠.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왜 안 믿어질까요?

    크리스천 중에도 중독자가 있고 이런 심리적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교회는 늘 이런 메시지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해.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 예수 그리스도가 너라는 한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거야.」 그 메시지대로라면 이렇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내가 엄청 귀한 존재구나. 신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건, 내가 천하보다 귀하다는 메시지 아닌가요.

    그런데 그게 안 믿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옆에서 외치고 알려줘도, 그게 복음인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왜냐. 자기가 자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나는 바보라는 그 믿음이 그 사람에게는 복음보다 더 진리예요. 마음속으로는 이런 거예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해, 이건 알겠어. 그런데 그 사랑은 나와 관계는 없어. 난 바보 같거든. 바보 같은 나를 하나님이 사랑할 일은 없지.」

    그래서 누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해」 하고 얘기해 주면, 「알고 있어요」 하고 말합니다. 이게 정말 알고 있는 게 아니에요. 말만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교회에서는 다들 그 말이 진리라고, 옳다고 하잖아요. 그 말을 반박할 수 있나요. 반박하면 「바보 멍청이, 그것도 모르냐」 이런 소리를 들을 텐데요. 이 사람은 자기가 바보라고 믿기 때문에, 바보라는 게 드러나지 않게 숨겨야 돼요. 그러니까 「알아요」 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말해도 자기 마음은 안 바뀌어요. 자기는 바보 같아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사랑할 리 없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죠.

    즉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를 싫어하고 혐오해요. 자기를 싫어하고 혐오하기 때문에 심리적 장애가 생기기 시작해요. 심리적 장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중독이에요.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중독자가 될 수 없어요.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건 자기중심적인 걸까요?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기독교인들은 한 번 걸립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타인을 사랑해야지. 그래서 이 이야기가 신앙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자기 사랑은 자기중심적 사고, 곧 자기만 생각하는 상태를 말해요.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예요. 우리가 자기를 귀하게 여겨야 된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만 생각하라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존귀하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 진실을 아는 거예요.

    우리가 존귀하기 때문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거예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신은 판단한 거예요.

  • 마음에 통증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도박 중독자에게는 도박이 일순위입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은 돈이 많이 드니까, 그 돈을 만들려다 나중에는 파는 쪽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돈이 필요하니까 파는 것이지요.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중독을 죄로 볼 것이냐 병으로 볼 것이냐는 물음이 먼저 올라옵니다. 두 가지를 함께 볼 수도 있겠지만, 그 판결은 잠시 내려놓고 중독이 되는 사람의 마음을 그냥 한번 보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중독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중독은 종류가 많습니다. 정부에서 지정한 4대 중독이 알코올, 마약, 도박, 게임입니다. 성중독도 상당히 많고, 운동 중독과 책 중독도 있습니다. 책을 너무 많이 보는 것이지요.

    중독은 현실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도망치는 거예요. 현실을 왜 도망치느냐 하면, 현실에 사는 게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부딪히기가 너무 힘드니까 어느 한 곳에 몰입하는 겁니다.

    책 중독은 좋은 것 같지만 책을 보느라 일상생활을 못 합니다. 그래서 좋은 중독도 있지 않으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좋은 중독은 없습니다. 모든 중독의 결말이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갖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미있어서 해요, 그냥 해요

    처음에는 좋고 재미있고 편합니다. 어떤 물질을 골랐든 처음은 그렇습니다. 게임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어른들 입장에서 보면 애들이 다 게임 중독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집에 자녀가 있으면 게임을 너무 많이 하네, 게임 중독이다,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말을 안 듣기 시작하면 박수를 쳐야 합니다」).

    심각한 게임 중독이냐, 아니면 중독은 안 됐고 게임이 좋아서 많이 하고 있느냐. 이 차이는 물어보면 대충 답이 나옵니다. 자녀에게든 청년에게든 물어보면 됩니다. 그러면 재미있어서 해요. 이러면 중독자가 아니에요. 근데 그냥 해요. 이러면 중독자로 볼 수 있어요.

    게임 중독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게임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을 함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 마음의 평안을 찾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재미있어서가 아닙니다(「연쇄살인자들은 다 착합니다 — 처음부터 그 욕망을 가진 게 아니에요」).

    술을 먹고 맞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을 먹으면 우리 몸의 감각이 마비가 됩니다. 그래서 술 먹고 맞으면 아프지가 않아요. 감각을 마비시키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하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릅니다. 게임을 하다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뉴스가 한 5년에 한 번씩 나옵니다. 신체에서 배고픔을 알려줘야 되는데 감각을 마비시켜버리니까, 몸에서 영양이 다 떨어져 나가도 배고프다는 신호의 감각을 못 느껴요. 게임을 하느라고 그 감각이 마비된 겁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파괴, 신체적으로 보면 감각 마비

    그래서 중독은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파괴성의 목적이 있고, 신체적으로 보면 자기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그것도 목적이에요. 자기 삶을 망가뜨리는 목적성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몸에 통증이 있으면 진통제를 먹습니다

    우리는 몸에 고통이 있으면 무엇을 먹습니까. 진통제를 먹지요. 감기에 걸렸거나 어디가 아프면 진통제를 먹어서 그 통증을 가라앉힙니다. 몸에 통증이 있으면 진통제를 먹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통증이 있으면 어떻게 해요?

    기도를 한다고 답합니다. 맞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한테 위안과 힘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현실을 직시해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립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중독자가 또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분노장애도 많습니다. 그게 다 마음에 고통이 있다는 현상들이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왜 하나님한테 위로와 위안과 힘을 못 얻을까. 이제 고민이 되는 지점입니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부분이에요.

    구원의 방법을 바깥에서 찾습니다

    기분이 꿀꿀하면 나가서 쇼핑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쇼핑 중독자가 되는 거죠. 가만히 보면 중독은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는 그 구원의 방법을 바깥에서 찾는 행위입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운데 문제 해결을 바깥에서 찾는 것이지요. 자식이 속을 썩이니까 술 한 잔 마시는 것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자기가 긴장하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프로포폴은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중독의 특성에는 진통을 해 주는 효과가 있고, 그런 약물들은 특히 몸을 느슨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중독자가 될 사람들은 항상 긴장하고 있습니다. 어깨에 항상 힘이 들어가 있고, 그래서 자기가 긴장하는지도 모르고 평상시에 맨날 그렇게 삽니다. 그러다 술이나 약이나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게 풀어져요. 어, 편안해. 어, 괜찮네. 뭔가 나를 평안하게 하네.

    몸의 통증에는 진통제가 있습니다. 마음의 통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 물음은 여기서 닫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앞에 먼저 놓아 볼 수 있는 물음은 하나 있어요. 나는 지금 재미있어서 하고 있습니까, 그냥 하고 있습니까.

  • 술이 우상이 아니고, 자기가 우상입니다

    중독이라고 하면 보통 술이나 마약부터 떠올립니다. 그런데 술이나 마약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이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무엇이라고 정해 놓았느냐, 곧 정체성이에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처럼 자기에 대해 한 번 내린 정의가 어떻게 굳고, 교회에 다녀도 왜 안 바뀌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중독으로 이어지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 정체는 어디서 정해지나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경험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합니다. 여기서 경험이라는 것은 양육의 환경, 곧 부모가 나를 어떻게 대하며 키웠느냐예요. 그 환경 속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자기의 정체를 확증합니다. 확증한다는 건, 그게 맞다고 굳게 믿게 된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렇습니다.

    늑대 소녀 들어보셨죠. 어렸을 때 늑대가 물어 가서 늑대들 속에서 자란 아이예요. 그러면 이 늑대 소녀가 인간입니까, 늑대입니까? 그 늑대 소녀는 자기가 인간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는 우리가 「너는 사람이야, 너는 인간이야」 하고 아무리 얘기해 줘도 그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인간의 말을 써본 적이 없고 늑대들하고만 어울려 놀았거든요. 그래서 자기는 늑대라는 정체성을 가져요. 그런데 그 아이는 실제로 늑대입니까, 인간입니까? 인간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누구나 자기가 실제로 누구인지, 곧 실존적 정체성을 사실상 몰라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에요. 어떤 환경에 놓였느냐가 곧 내가 생각하는 나예요. 그런데 그건 진짜 나는 아니잖아요.

    똥이 묻은 황금은 황금이 아닐까요?

    황금 덩어리에 똥이 묻었어요. 그러면 그 황금은 황금이 아닐까요? 똥이 묻어도 황금은 황금이죠. 그런데 그 황금은 자기가 똥이 묻으면 자기가 똥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황금은 진짜 나예요. 똥은 자라면서 환경 속에서 나한테 묻은 것이고요.

    우리가 자기를 생각하는 방식은 실체, 곧 진짜 나에 근거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내가 실체처럼 느껴져요. 왜 그럴까요? 부모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고, 나를 막 대했고, 나를 방치했고, 나를 학대했고,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어요.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구나」 하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그것을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이런 대접이 바로 황금에 묻은 똥인데, 그 똥을 자기라고 여기는 거예요.

    한 번 「나는 똥이야」라고 정의를 내리면, 복음을 들어도 바뀌나요?

    나는 똥이야. 나는 쓰레기야. 나는 한심해. 사람은 자기를 두고 이렇게 한 번 정의를 내리면, 이걸 안 바꿔요.

    그래서 교회에서 「너는 귀한 존재다」 하는 복음과 진리를 들려줘도 그 정의가 안 바뀝니다. 마음에서 탁 막아요.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게 좋은 소리인 건 알아. 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그런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귀한 존재로 태어난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 말이 마음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자기를 똥으로 여기는 그 마음이 치료가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거짓 믿음에 빠져서 평생 그 믿음대로 살게 됩니다.

    교회에 나가면 자기에 대한 믿음이 깨지나요?

    「나는 똥이야」 하는 자기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가진 채 교회에 나갑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서 그 믿음을 깨트리는 게 아니고, 그 믿음을 잠시 보류시키는 작업을 해요. 교회에 있는 동안만 그 믿음을 옆으로 치워 두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 행위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예배나 기도 같은 종교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하고 하나님하고 살짝 연결돼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위안을 좀 받거든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자기 믿음을 바꾸지는 않아요.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복음이 마음 깊이 들어가서 「나는 똥이야」처럼 원래 가지고 있던 믿음 체계를 깨트리면, 한 번 마시는 것으로 충분해요. 더는 계속 달라고 하거나 목말라 애타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물을 마시지 않고 겉에 뿌리기만 하면 금방 말라 버려요. 복음이 마음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겉에만 닿으면, 계속 다시 목이 마르다는 거예요. 속으로는 여전히 「나 자체는 똥이야」 하고 믿어요. 그래도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으니까, 뭔가 노력은 해야겠다 싶어서 거룩한 곳, 곧 교회에 살짝 발을 들입니다. 가서 「그래도 나는 그나마 조금 괜찮은 사람이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도 하고 관계도 맺고 삶을 살아갑니다. 속으로 진짜 믿고 있는 그 믿음은 안 깨트린 채로요. 이게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취하는 태도예요.

    이 믿음은 마음속에 몰래 숨어 있어서 사람들이 잘 못 알아봐요. 심지어 자기가 자기도 속여요. 그런데 태도, 행동, 관계 속에서는 이걸 속일 수가 없어요. 관계 속에서 다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남의 평판과 평가에 지나치게 휘둘려요. 그래서 삶이 힘들어지기 시작해요. 이 풀리지 않는 괴로움을 단박에 해소해 주는 게 중독입니다. 술이나 마약은 감각을 마비시켜서,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그 괴로움에서 풀려나게 해 주거든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 말씀을 좇고 다른 걸 아무리 해도, 누구든 이 중독을 이길 재간이 없어요.

    술이 진짜 우상인가요?

    신앙적으로는 중독을 우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술이 하나님보다 더 좋구나, 마약이 하나님보다 더 좋구나, 돈이 하나님보다 더 좋구나」 하고 보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우상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실제로 더 파고들어 보면 술이 우상이 아니고 자기가 우상입니다. 자기 믿음을 안 바꾸거든요. 자기 생각이 진리보다 더 우선시돼요. 자기를 잘났다고 떠받든다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이 「너는 귀한 존재다」라고 말해도, 「나는 똥이야」 하는 자기 생각을 그보다 더 믿고 따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다가도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호구로 볼 거야. 그러니까 난 이렇게 안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화를 잘 내요. 화를 왜 그렇게 잘 낼까요? 속으로 자기를 한심하다고 믿으니까, 남들도 나를 호구로, 바보로 볼까 봐 염려해서 내는 거예요.

    성격은 타고나는 걸까요?

    이렇게 화를 잘 내는 걸 보고 원래 성격이 그렇다고, 성격은 타고나는 거라고 알고 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성격은 타고나는 게 아니에요. 어린 시절에 양육의 환경 속에서 자기가 살아남는 방식, 그게 굳어진 게 성격입니다. 사람도 하나의 유기체라서 생존 본능에 따라 살아남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그 환경에 가장 최적화된 삶의 전략을 만들고, 그것을 사용해 봅니다. 엄마나 아빠한테 계속 써 보면서 「이게 가장 안전하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이가 「엄마 나 아파」 하면 돌아오는 말은 「조용해, 엄마 지금 이거 하고 있는데 시끄럽게」입니다. 아이가 분명히 자기의 마음을 엄마한테 소통을 했는데 오히려 혼났습니다. 옛날에는 운다고 많이 혼났잖아요. 「뭘 잘했다고」 이러면서요. 그러면 그 아이는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되는구나, 내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면 내가 혼나고 처벌받는구나」 합니다. 그래서 감정을 숨깁니다. 숨겨 봤더니 혼나는 일이 많지 않게 돼요. 계속 징징거릴 때보다 엄마한테 야단맞는 일이 적으니까, 감정을 숨기는 게 그 아이에게 최적화된 방법이 됩니다. 「내 마음을, 내 욕구를 표현해 봤자 나만 손해 보고 혼나니까 그냥 내가 감당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자란 사람들은 말을 안 해요. 말을 해야 될 때도 안 합니다. 자기 보호를 위해서 성격이 이런 식으로 굳어진 겁니다.

    억압을 많이 할수록 왜 일탈이 더 필요해질까요?

    그런데 이런 성격은 감정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밖으로 내지 못하고 안으로 꾹 눌러 두는 거예요. 사람은 서로 소통하고 감정을 나눠야 행복해지는데, 그걸 또 스스로가 막고 있으니까 답답하고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술 한 잔 마시면 말 없는 사람이 말이 많아집니다. 「감정을 표현하면 안 돼」 하고 스스로 금지하고 있던 것이, 술이 감각을 마비시키니까 풀어져요. 풀어지면서 일순간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술만이 아니라, 평소의 자기를 벗어나는 모든 일탈이 이런 식입니다. 마음속에 뭔가 환기가 돼요. 그래서 오히려 억압을 많이 할수록 이 일탈을 많이 필요하게 돼요.

    앞에서 본 「나는 똥이야」 하는 믿음도, 감정을 꾹 눌러 두는 성격도 모두 어린 시절 양육의 환경 속에서 굳은 것이에요. 둘 다 삶을 괴롭고 답답하게 만듭니다. 알고 보면 중독은, 이런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짧은 시간에 자기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그 무엇을 찾은 겁니다.

    고통은 그대로인데 중독이라는 진통약만 먹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래서 중독을 없애려면 「중독을 하지 마라」 하고 말하는 게 답이 아닙니다. 중독은 마음의 고통을 잠시 멎게 해 주는 진통약이에요. 내 고통이 진짜로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근원을 알아야 해요. 앞에서 본 대로, 어린 시절에 굳은 그 믿음과 성격이 그 근원이에요. 그 고통이 해결될 때, 이 진통약을 자연스럽게 먹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런데 고통이 계속 있는데 진통약을 먹지 말라고 하면 이 사람은 죽을 가능성이 있어요. 고통은 그대로인데, 잠깐이나마 숨통을 틔워 주던 것마저 없어지니까요. 더 안 좋아지는 선택을 하는 겁니다. 중독도 나쁘지만, 그보다 더 극단적 선택으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 그런 얘기를 하면 그 행동을 안 합니다

    톱으로 다 잘라버리고 싶다고 말한 분이 있었어요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자리에서 어떤 얘기든지 괜찮다고 자리를 만들어 드려도,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되게 선한 기준을 갖고 자기 마음을 막아 왔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이라면 품지 않을 생각은 내 안에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미리 정해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정해놓으면 그 생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말이 되지 못한 채로 안에 남습니다.

    이런 분이 있었어요. 기회가 되어 입을 열었는데, 그런 사람 톱으로 다 잘라버리고 싶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는 동안 이분이 조금씩 조금씩 이성을 찾게 됐습니다. 누구를 자르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그 순간, 어린 시절의 어떤 아저씨가 올라왔습니다. 그 아저씨의 손길이요. 그동안 억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하면 그 행동을 안 합니다

    여기서 순서를 거꾸로 아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면 그런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요.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면 우리가 그 행동을 안 합니다. 안을 놓고 이렇게 있을 때 그 행동을 하게 되는 거예요.

    다만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어디였는지는 같이 보셔야 합니다. 어떤 얘기든지 괜찮다고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 말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말이 되어 나온 것은 내가 보는 대상이 됩니다.

    이름이 붙지 않은 것이 어떻게 사람을 붙잡고 있는지는 「미워하고 있으면, 슬퍼하지 않아도 됩니다」에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여기서 볼 것은 그 반대쪽입니다. 톱 얘기를 하던 그분은 말을 꺼내는 동안 바로 그 자리에서 이성을 찾아갔고, 반대로 안에 그냥 놓아둔 것은 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러다 그 행동으로 갑니다.

    슬픔은 슬픔으로, 기쁨은 기쁨으로 말이 되어 나오게 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이 자리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자리입니다. 우리 안의 것들을 잘 들여다보고 케어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슬픔은 슬픔으로 기쁨은 기쁨으로, 우울함은 우울함으로 이것을 허용해 주고 받아준 이 과정들이 나를 사랑하는 그 과정이에요. 슬픔을 슬픔으로 받는다는 건 슬픔에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슬픈데 괜찮다고 하지 않고, 슬픈데 나약하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 갖고 오세요, 그리고 먼저 용서를 해줘야 돼요

    내가 뭔가 부족하다, 내가 약하다, 나는 이런 게 참 안 된다. 그것을 부인하기보다는 다 갖고 오세요. 자기한테요. 그리고 먼저 용서를 해줘야 돼요. 계속 못됐다는 느낌이 들 때 그 위에 좋은 말을 계속 붙이지 말고, 그냥 그래 내가 못됐다 인정하고 못된 나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어난 게 내 잘못인 것 같아요

    상처가 많을수록 이런 마음이 듭니다. 딸로 태어난 게 내 잘못이야, 이런 마음이요. 아니라고 한 번 얘기해도 안 되면 그거 굳이 아니라고 얘기할 것 없이 그냥 갖고 와버려요. 갖고 와서 딸로 태어난 건 내 잘못입니다 하고, 그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예 내 것으로 갖고 와야 용서할 대상이 내 손에 들어옵니다. 밖에 세워두고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건 짚고 가야겠습니다. 안 떨어지려고 하는 것을 혼자 계속 떼려고 해 봐야 잘 되지 않습니다. 여기는 전문적으로 심리적 접근이 필요하고, 일반인들이 이거 떼내기는 어려워요. 오늘 읽고 혼자 안 된다고 해서 자기를 다시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닌데 왜 용서를 하지?

    여기서 반문이 올라옵니다. 아니 그건 내 잘못이 아닌데 왜 용서를 하지? 잘못한 게 없는데 용서한다고 하면 없는 죄를 내가 뒤집어쓰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하고 밀고는 있지만, 느낌은 계속 자기 잘못이라고 느껴집니다. 밀어내려고 하는 게 인정을 안 해주는 거거든요. 밀어내는 힘만큼 그 느낌은 그 자리를 지킵니다.

    심리적 실제는 외적 실제보다 더 강합니다

    머리로는 내 잘못이 아닌 걸 아는데도 마음에서는 진짜로 자기 잘못으로 느껴지는 것, 이것이 심리적 실제입니다. 그리고 심리적 실제는 외적 실제보다 더 강합니다. 밖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보다, 내 안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쪽이 나를 더 많이 움직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할 일은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게 아닙니다. 고쳐야 할 것이 사실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가 태어난 것은 네 결정이 아니었다고 백 번 확인해줘도, 확인은 밖의 일이고 느낌은 안의 일이라 서로 닿지 않습니다.

    그 느낌을 실제로 있는 것으로 놓고 봐야 돼요. 그렇게 놓고 부정하지 말고 인정을 해줘야 됩니다. 인정을 해줘야 그 마음이 내 손에 들어오고, 손에 들어온 다음에야 용서라는 말이 갈 자리가 생깁니다.

    인정으로 받는가, 자기 처벌로 받는가

    내가 못됐다까지 갖고 오라는 말이 나를 벌주라는 말로 읽히면 반대로 갑니다. 「나를 돌아볼수록 왜 더 미워질까요」에서 도덕적인 판단을 떼어내라고 한 것과, 여기서 내가 못됐다를 갖고 오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갈라지는 자리는 그 문장 뒤에 무엇이 붙는가입니다.

    그래 내가 못됐다 다음에 그러니까 나는 이런 인간이다, 그러니까 나는 벌을 받아야 한다가 붙으면 자기 처벌입니다. 마음 하나를 인정한 게 아니라 사람 전체에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같은 문장 다음에 그 못된 나를 용서한다가 붙으면 인정입니다. 지금 내 안에 이런 마음이 있다에서 문장이 끝나고, 그 마음은 인정을 받습니다. 떼어낼 것은 나에게 내리는 판결이고, 갖고 올 것은 그 느낌입니다.

    나의 몸을, 내 감정을, 내 생각을, 나의 환상까지

    자기가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그 과정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내 감정을, 내 생각을, 그리고 나의 환상까지요.

    이 환상에서 많이들 안 합니다. 환상은 되게 다 기괴하기 때문에 입 밖에 잘 안 내려고 하고, 부인하려고 해요. 안 돼, 하면서 덮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걸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해치는 그림이 안에서 지나갔을 때, 그걸 나쁘다고 평가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내가 지금 되게 화가 나 있구나, 이 정도만 받아주면 돼요. 받아준다는 것은 그 그림을 더 그려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을 지나간 대로 두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까지면 됩니다.

    안에서 지나간 것을 두고 이런 사악한 행동을 내가 하다니, 하면서 덮으면 더 문제가 커집니다. 모든 인간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러니 나쁘다고 하지 말고 그 환상들을 사랑해주는 과정으로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스스로 사랑하십시오.

  • 내 것을 챙기려니 죄책감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내 것을 챙기는 순간에 미안함이 먼저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챙기긴 챙겼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챙기는 일을 미룹니다. 미루다 보면 내 몫으로 챙길 것이 남지 않습니다.

    듣기 싫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왜 일부러 꺼낼까요?

    ‘이기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렇게 듣기 싫어하는 단어입니다. 누가 나를 두고 이기적이라고 하면 바로 억울해지고, 스스로 그 말을 떠올려도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이 단어를 일부러 꺼내 보려 합니다. 사랑과 반대인 말처럼 들리지만,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안에는 이기적인 것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것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중에 남을 위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이타성, 곧 남을 위하는 마음은 나를 소진시키지 않습니다. 소진은 안에 있던 것을 다 써서 남은 게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기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먼저이고, 남을 위하는 일은 그다음이라는 순서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것을 챙기는 일과 그 뒤에 올라오는 죄책감은 같은 것일까요?

    내 것을 챙기고 나서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일이 흔합니다. 챙기는 데까지는 했는데, 챙긴 다음에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챙기기 전에 먼저 망설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말이 있습니다. 당신 것을 챙길 수 있어야 하고, 당신의 것을 지키고 챙기는 일에 죄책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 것을 챙기는 행동과, 그 행동 뒤에 따라붙는 죄책감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챙기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죄책감은 그 일에 따라올 뿐, 챙기는 일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챙긴 뒤에 죄책감이 올라온다고 해서, 챙긴 일이 잘못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기적인 게 베이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기적인 게 베이스입니다. 베이스는 밑에 깔리는 토대라는 말입니다. 그 이기적인 토대 위에 이타성이 있어야 합니다.

    집을 지을 때와 같은 순서입니다. 바닥을 먼저 다지고 그 위에 벽을 세웁니다. 여기서 바닥은 나를 챙기는 일이고, 그 위에 세우는 벽은 남을 위하는 일입니다. 순서를 뒤집으면 바닥 없이 벽만 세운 집이 됩니다. 밖에서 보면 집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사는 사람이 버티지 못합니다.

    남을 돕고 나서 뿌듯한 게 아니라 안이 텅 비는 느낌이 든다면, 남을 위하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나를 챙기는 토대 없이 남을 위하는 일만 올려 둔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타성이 나를 소진시키지 않고 살아 있으려면, 나를 챙기는 그 토대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을 위하기 전에 먼저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아끼고 내 것을 챙기는 일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기적인 게 베이스라면, 내 것만 챙기라는 말인가요?

    여기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내 것만 챙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내 것만 챙기는 것과 내 것을 지키는 힘, 이 둘은 겉으로 비슷해 보여서 자주 섞입니다. 그래서 내 것을 지키려 할 때도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것을 지키는 이 힘을 굳이 ‘이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보다 나를 먼저 챙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먼저 챙기는 것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나를 먼저 챙기는 것처럼, 사랑도 순서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해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도 겉으로 보면 이타적으로 보입니다. 하는 일도 남을 위한 일이고, 주는 것도 실제로 줍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에게는 그 주는 마음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겉으로 보이는 모양이 아니라, 주는 마음이 진실할 때 전달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나 하나만의 이야기일까요?

    그렇다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나’ 하나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는 늘 너, 곧 다른 사람과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자기사랑은 나와 너를 둘로 갈라놓고 나 한쪽만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와 너를 둘로 쪼개는 것을 분열이라고 합니다. 자기사랑은 하나로 묶여 있는 나와 너를 함께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나와 너를 이렇게 갈라놓지 않는 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고, 사랑은 분열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엇도 밀어내지 않고 모든 것을 안으로 들여 포함합니다. 그래서 사랑하기 시작하면 상대를 다 수용하고 받아들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 나와 상대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분열과 두려움, 고통과 갈등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갈등이 내가 선택해서 생긴 거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깥 상황이고 바깥 사람들이라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했는지 안 했는지는 이 갈등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와 상대가 갈라져 있을 때는 싸움이 일어나고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해 버리니까, 상대가 뭐라고 하든 내가 아는 것만 듣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반대로, 상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사랑은 나와 너를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것을 챙기는 일은 너를 밀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둘을 함께 사랑하되, 사랑은 나에게서 시작해 너에게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순서상 내가 먼저인 것뿐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길 수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아끼고, 내 것을 먼저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게 행복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챙기고 나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챙기는 일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따라붙은 죄책감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것을 챙기려는데 죄책감이 먼저 올라온다면, 챙기지 말라는 신호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하는 마음이 올라와도, 내 것을 챙기려는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면 됩니다. 나를 챙기는 이 토대가 놓인 다음에 올라가는 이타성이,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 이타성입니다.

  • 맞아도 멍이 안 드는 몸이 싫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어릴 때 겪은 일을 이야기하면서, 지금도 몸에 멍이 들면 좋다고 말한 분이 있었어요. 가리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놓고 밖에 나간다고 했습니다.

    처음 들으면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멍은 아팠던 자리이고, 보통은 가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를 들으면 그 말이 이해가 됩니다.

    맞아도 멍이 안 드는 몸이 왜 싫었을까요?

    이분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맞아도 멍이 안 드는 몸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분에게는 다행이 아니었습니다.

    멍이 들면 저녁에 아버지에게 보여 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보여 줄 것이 몸에 남지 않았습니다. 멍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먼저 보고 “몸이 왜 저래?” 하고 물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자기 몸이 싫었다고 했습니다. 맞은 자리가 싫었던 것이 아닙니다. 맞은 것이 남지 않는 몸이 싫었던 것입니다.

    멍이 있었다면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멍이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에게 말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멍을 보고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어머니가 때렸다는 것이 드러나 어머니가 혼이 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혼난 일을 아이에게 되갚을 것이라는 걸 아이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이것을 보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이 앞에는 두 갈래가 있었습니다. 멍이 있으면 보여 주고 알릴 수 있지만, 알리면 보복을 당합니다. 멍이 없으면 보여 줄 것이 없습니다. 말로만 이르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말로 일러도 보복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쪽이든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아버지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기억을 가둬놓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이런 일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미쳐버립니다. 그래서 그 기억을 평소에는 자기도 꺼내 볼 수 없는 곳에 가둬놓습니다. 이곳을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억은 가둬 두어도, 몸은 어릴 때 하던 것을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합니다. 이분에게는 잠잘 때 그랬습니다.

    이분은 너무 많이 맞다 보니 자기가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애벌레인 줄 알았다고요. 어릴 적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겪기 전까지는 침대에서 자도 늘 끝에서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잤습니다. 자다가 흑흑 소리를 냈습니다. 어릴 때는 울면 혼나니까 못 울었고, 그 울음이 잠결에 나온 것입니다. 남편이 그것을 보기 버거워했다고 합니다.

    회초리를 옆에 두고 공부가 됐을까요?

    자기가 애벌레인 줄 알았던 이분은 “애벌레가 공부를 잘하겠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정말 못했고 늘 꼴찌였습니다. 어머니가 공부를 시키는데 회초리를 옆에 갖다 놓고 시켰습니다. 그러니 집중이 안 됩니다. 회초리가 옆에 있으니 언제 맞을지 모르고, 그 공포와 두려움이 아이를 사로잡습니다. 받아쓰기는 매일 20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순서를 뒤집으면 안 됩니다. 공부를 못해서 회초리가 옆에 온 것이 아닙니다. 회초리가 옆에 있어서 20점이 나온 것입니다. 앉아 있는 동안 아이의 힘이 글자가 아니라 옆에 놓인 회초리를 살피는 데에 다 쓰였습니다.

    95점을 못 올려놓은 아이는 자기를 어떻게 느낄까요?

    초등학교 때 95점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시험지를 겹쳐서 걸어놓았습니다. 아이들 창피를 주려고 그랬나 싶다고 했습니다. 밑에는 빵점짜리 시험지도 있고 20점짜리도 있었습니다. 이분이 그 95점짜리를 맨 위에 올려놨는데, 어머니가 못 올려놓게 했습니다.

    20점은 매일 받았습니다. 95점은 한 번 받았는데, 그마저 위에 올려놓지 못했습니다. 맞은 것은 몸에 남지 않고, 잘한 것은 위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이 아이가 겪은 일도, 해낸 일도 밖에서는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분은 자존감도 낮고, 자기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도 참 낮았다고 했습니다.

    시험에 붙었는데 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이 낮은 자존감이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성인이 돼서 본 시험까지 이어집니다. 이분은 몇 년 전에 상담사 시험에 붙었습니다. 붙었으면 ‘아, 진짜 잘했다’ 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됐습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이분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컴퓨터 채점이 잘못됐을 거야.’ ‘이제 연락이 와서, 채점이 잘못돼 떨어졌다고 할 거야.’ ‘연락이 안 오면, 아주 간신히 붙었을 거야.’ 이분은 그러고 있는 자신을 봤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95점 시험지를 맨 위에 올려놓지 못했던 일과 같습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못 올려놓게 했습니다. 이번에는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본인이 자기 합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던 아이에게서 왜 공격성이 많아질까요?

    맞을 때 어머니는 힘이 셌고 어린아이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느낌을 무력감이라고 합니다. 멍이 안 드는 몸에서 이 무력감이 잘 드러납니다. 맞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맞았다는 것이 몸에 남지도 않으니 알릴 수도 없습니다.

    아이는 이 무력감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맞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메우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을 보상 심리라고 합니다. 이 마음 때문에 지지 않으려는 힘이 많아집니다. 이 힘을 공격성이라고 합니다. 이분은 자기가 공격성이 많다고 했습니다.

    공격성이라고 하면 나쁜 것으로 들립니다. 나쁜 것으로 보면 그 사람은 자기 힘을 눌러야 합니다. 힘을 누르고 나면 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무력감이 한 번 더 오는 것입니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위니캇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공격성은 나쁜 것이 아니고 에너지가 된다고 봤습니다. 이분은 지금 에너지가 정말 많다고 했습니다. 공격성이 에너지가 된 것입니다.

    어릴 때 겪은 일은 어른이 된 뒤 무엇으로 남을까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분은 지금도 멍이 들면 좋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이분이 싫었던 것은 맞아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몸이었습니다. 멍이 들어야 아버지에게 보여 줄 수 있었는데, 멍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어른이 된 지금, 멍이 들면 좋은 마음으로 남았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무엇이 반복되는지 보입니다. 반복되는 것은 맞은 일 자체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때의 모습이 어른이 된 뒤에도 되풀이됩니다. 결혼한 뒤에도 애벌레처럼 침대 끝에 웅크려 잤고, 시험에 붙고도 95점 시험지를 못 올려놓던 때처럼 합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남 앞에서 설명이 잘 안 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대개 어릴 때 견딜 수 없던 상황에서 아이가 찾아낼 수 있었던 방법입니다. 그 상황은 지나갔는데 방법만 남아서,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 나옵니다. 이분도 어릴 때는 울면 혼나니까 울음을 참았고, 견딜 수 없는 기억은 가둬놓았습니다. 그렇게 참았던 울음이 어른이 된 뒤 잠결에 흑흑 소리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시절이 남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힘입니다. 무력감을 메우려다 많아진 공격성이 지금은 이분의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복이 멈춘 것도 있습니다. 이분은 웅크리고 잤던 이야기를 하면서 “치유 과정을 겪기 전까지는”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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