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 전날 밤을 새우고, 관계가 안정되면 먼저 싸움을 만들고, 일이 잘될 때 갑자기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라면 우연일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도 같은 결말이 반복된다면 행동을 이끄는 오래된 믿음을 살펴야 합니다.
반복되는 실패 뒤에는 어린 시절의 어떤 결론이 있을까요?
심리학의 한 갈래인 교류분석에서는 이런 반복을 ‘인생각본’이라고 부릅니다. 영화에 대본이 있듯, 내 인생에도 나도 모르게 깔려 있는 대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대본의 내용은 어린 시절에 내린 결론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말과 부모와의 관계를 나름대로 해석해 ‘나는 성공하면 안 된다’, ‘가까워지면 버림받는다’ 같은 결론을 스스로 내립니다. 이 결론이 어른이 된 뒤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본인은 그런 결론을 내린 줄도 모릅니다. 모르는 채로 잘 살아 보려고 애쓰다가, 중요한 순간마다 그 결론에 걸려 넘어집니다.
각본은 정해진 운명일까요, 아이가 만든 해석일까요?
각본은 정해진 운명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그때 처한 상황에서 내릴 수 있었던 나름의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제발 엄마 좀 귀찮게 하지 마’라고 반복하면, 아이는 그 말이 왜 나왔는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엄마가 지쳤구나’가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을 말하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 결론은 그때 엄마와의 관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이는 조용하고 손이 가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림받을 위험을 줄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기회를 양보합니다. 삶을 그 결론에 맞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수록 어릴 때의 결론은 더 굳어집니다.
성공을 앞두면 왜 오히려 불안해질까요?
오랫동안 자신을 실패하는 사람으로 알고 살았다면 성공은 기쁨만 주지 않습니다. 성공하면 책임이 커집니다. 가족보다 앞서가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늘 그렇게 알고 살아온 ‘실패하는 나’라는 모습이 깨집니다. 성공을 앞두고 불안해지는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익숙한 자기 모습이 깨지는 것이 두려워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준비를 멈추거나 결정적인 약속에 늦습니다.
이 행동은 의식적으로 실패를 원하는 선택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익숙한 자기 모습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나쁜 모습이라도 오랫동안 그 모습에 맞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또 실패하면 가족보다 앞서가지 않아도 되니, 가족과의 관계도 지금 그대로 남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뒤 ‘역시 나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들면 고통스러우면서도, 늘 알던 내 모습으로 돌아와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피하려는 행동이 어떻게 두려운 결말을 만들까요?
버림받을까 두려워 상대의 연락을 확인하고 추궁하면, 상대는 지쳐서 거리를 둡니다. 그러면 ‘사람은 결국 나를 떠난다’는 믿음이 더 굳어집니다. 버림받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 오히려 버림받는 결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에도 이런 일이 나옵니다. ‘네 아들이 너를 죽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 오이디푸스가 태어나자 내다 버립니다. 버려진 오이디푸스는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자랐고 훗날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고 맙니다. 예언을 피하려고 아들을 버린 일이 오히려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어 예언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각본도 이와 같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피하려고 애써도, 그것만으로는 각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나려면 먼저 내 각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결말이 무엇인지, 그 결말을 피하려고 되풀이하는 행동이 오히려 그 결말을 부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각본을 알아보고 바꾸려면 무엇부터 적어야 할까요?
‘나는 왜 이럴까’ 하고 막연히 묻기보다, 일이 잘 풀리려다 무너진 순간을 하나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그 직전에 무슨 생각이 들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적어야 합니다. ‘발표 전날 수정만 반복하다 잠을 못 잤다’, ‘상대가 가까워지자 단점을 찾아 싸움을 걸었다’처럼 실제로 한 행동을 그대로 써야 합니다.
그때 든 생각이 ‘나 같은 게 무슨’, ‘어차피 안 될 텐데’ 같은 말이었다면, 그 말이 어릴 때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과 닮아 있지 않은지 살펴봅니다. 닮아 있다면, 어릴 때 그 말을 들으며 내린 결론이 지금도 내 선택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각본입니다.
그다음, 그 행동으로 무엇을 피할 수 있었는지 찾습니다. 일이 잘되었다면 마주했을 두려움입니다. 책임이 커진 뒤 기대에 못 미쳐 부끄러워질까 봐, 가족보다 앞서가 죄스러워질까 봐, 가까워진 뒤 버림받을까 봐 겁이 났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결론은 운명이 아닙니다. 아이가 내린 해석이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면서 굳어진 것입니다. 모르면 늘 하던 행동을 계속하지만 내 각본과 그 두려움을 알고 나면 다른 행동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에서 다른 행동을 되풀이하면 어릴 때의 결론도 바뀔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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