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우상이 아니고, 자기가 우상입니다

중독이라고 하면 보통 술이나 마약부터 떠올립니다. 그런데 술이나 마약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이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무엇이라고 정해 놓았느냐, 곧 정체성이에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처럼 자기에 대해 한 번 내린 정의가 어떻게 굳고, 교회에 다녀도 왜 안 바뀌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중독으로 이어지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 정체는 어디서 정해지나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경험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합니다. 여기서 경험이라는 것은 양육의 환경, 곧 부모가 나를 어떻게 대하며 키웠느냐예요. 그 환경 속에서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자기의 정체를 확증합니다. 확증한다는 건, 그게 맞다고 굳게 믿게 된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렇습니다.

늑대 소녀 들어보셨죠. 어렸을 때 늑대가 물어 가서 늑대들 속에서 자란 아이예요. 그러면 이 늑대 소녀가 인간입니까, 늑대입니까? 그 늑대 소녀는 자기가 인간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는 우리가 「너는 사람이야, 너는 인간이야」 하고 아무리 얘기해 줘도 그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인간의 말을 써본 적이 없고 늑대들하고만 어울려 놀았거든요. 그래서 자기는 늑대라는 정체성을 가져요. 그런데 그 아이는 실제로 늑대입니까, 인간입니까? 인간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누구나 자기가 실제로 누구인지, 곧 실존적 정체성을 사실상 몰라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에요. 어떤 환경에 놓였느냐가 곧 내가 생각하는 나예요. 그런데 그건 진짜 나는 아니잖아요.

똥이 묻은 황금은 황금이 아닐까요?

황금 덩어리에 똥이 묻었어요. 그러면 그 황금은 황금이 아닐까요? 똥이 묻어도 황금은 황금이죠. 그런데 그 황금은 자기가 똥이 묻으면 자기가 똥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황금은 진짜 나예요. 똥은 자라면서 환경 속에서 나한테 묻은 것이고요.

우리가 자기를 생각하는 방식은 실체, 곧 진짜 나에 근거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내가 실체처럼 느껴져요. 왜 그럴까요? 부모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고, 나를 막 대했고, 나를 방치했고, 나를 학대했고,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어요.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구나」 하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런 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그것을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이런 대접이 바로 황금에 묻은 똥인데, 그 똥을 자기라고 여기는 거예요.

한 번 「나는 똥이야」라고 정의를 내리면, 복음을 들어도 바뀌나요?

나는 똥이야. 나는 쓰레기야. 나는 한심해. 사람은 자기를 두고 이렇게 한 번 정의를 내리면, 이걸 안 바꿔요.

그래서 교회에서 「너는 귀한 존재다」 하는 복음과 진리를 들려줘도 그 정의가 안 바뀝니다. 마음에서 탁 막아요.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게 좋은 소리인 건 알아. 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그런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귀한 존재로 태어난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 말이 마음에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자기를 똥으로 여기는 그 마음이 치료가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거짓 믿음에 빠져서 평생 그 믿음대로 살게 됩니다.

교회에 나가면 자기에 대한 믿음이 깨지나요?

「나는 똥이야」 하는 자기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가진 채 교회에 나갑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서 그 믿음을 깨트리는 게 아니고, 그 믿음을 잠시 보류시키는 작업을 해요. 교회에 있는 동안만 그 믿음을 옆으로 치워 두는 거예요. 그래서 종교 행위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예배나 기도 같은 종교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하고 하나님하고 살짝 연결돼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위안을 좀 받거든요. 그런데 궁극적으로 자기 믿음을 바꾸지는 않아요.

예수님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복음이 마음 깊이 들어가서 「나는 똥이야」처럼 원래 가지고 있던 믿음 체계를 깨트리면, 한 번 마시는 것으로 충분해요. 더는 계속 달라고 하거나 목말라 애타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물을 마시지 않고 겉에 뿌리기만 하면 금방 말라 버려요. 복음이 마음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겉에만 닿으면, 계속 다시 목이 마르다는 거예요. 속으로는 여전히 「나 자체는 똥이야」 하고 믿어요. 그래도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으니까, 뭔가 노력은 해야겠다 싶어서 거룩한 곳, 곧 교회에 살짝 발을 들입니다. 가서 「그래도 나는 그나마 조금 괜찮은 사람이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도 하고 관계도 맺고 삶을 살아갑니다. 속으로 진짜 믿고 있는 그 믿음은 안 깨트린 채로요. 이게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취하는 태도예요.

이 믿음은 마음속에 몰래 숨어 있어서 사람들이 잘 못 알아봐요. 심지어 자기가 자기도 속여요. 그런데 태도, 행동, 관계 속에서는 이걸 속일 수가 없어요. 관계 속에서 다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남의 평판과 평가에 지나치게 휘둘려요. 그래서 삶이 힘들어지기 시작해요. 이 풀리지 않는 괴로움을 단박에 해소해 주는 게 중독입니다. 술이나 마약은 감각을 마비시켜서,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그 괴로움에서 풀려나게 해 주거든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 말씀을 좇고 다른 걸 아무리 해도, 누구든 이 중독을 이길 재간이 없어요.

술이 진짜 우상인가요?

신앙적으로는 중독을 우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술이 하나님보다 더 좋구나, 마약이 하나님보다 더 좋구나, 돈이 하나님보다 더 좋구나」 하고 보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우상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실제로 더 파고들어 보면 술이 우상이 아니고 자기가 우상입니다. 자기 믿음을 안 바꾸거든요. 자기 생각이 진리보다 더 우선시돼요. 자기를 잘났다고 떠받든다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이 「너는 귀한 존재다」라고 말해도, 「나는 똥이야」 하는 자기 생각을 그보다 더 믿고 따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다가도 「내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호구로 볼 거야. 그러니까 난 이렇게 안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화를 잘 내요. 화를 왜 그렇게 잘 낼까요? 속으로 자기를 한심하다고 믿으니까, 남들도 나를 호구로, 바보로 볼까 봐 염려해서 내는 거예요.

성격은 타고나는 걸까요?

이렇게 화를 잘 내는 걸 보고 원래 성격이 그렇다고, 성격은 타고나는 거라고 알고 계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성격은 타고나는 게 아니에요. 어린 시절에 양육의 환경 속에서 자기가 살아남는 방식, 그게 굳어진 게 성격입니다. 사람도 하나의 유기체라서 생존 본능에 따라 살아남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그 환경에 가장 최적화된 삶의 전략을 만들고, 그것을 사용해 봅니다. 엄마나 아빠한테 계속 써 보면서 「이게 가장 안전하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이가 「엄마 나 아파」 하면 돌아오는 말은 「조용해, 엄마 지금 이거 하고 있는데 시끄럽게」입니다. 아이가 분명히 자기의 마음을 엄마한테 소통을 했는데 오히려 혼났습니다. 옛날에는 운다고 많이 혼났잖아요. 「뭘 잘했다고」 이러면서요. 그러면 그 아이는 「감정을 표현하면 안 되는구나, 내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면 내가 혼나고 처벌받는구나」 합니다. 그래서 감정을 숨깁니다. 숨겨 봤더니 혼나는 일이 많지 않게 돼요. 계속 징징거릴 때보다 엄마한테 야단맞는 일이 적으니까, 감정을 숨기는 게 그 아이에게 최적화된 방법이 됩니다. 「내 마음을, 내 욕구를 표현해 봤자 나만 손해 보고 혼나니까 그냥 내가 감당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자란 사람들은 말을 안 해요. 말을 해야 될 때도 안 합니다. 자기 보호를 위해서 성격이 이런 식으로 굳어진 겁니다.

억압을 많이 할수록 왜 일탈이 더 필요해질까요?

그런데 이런 성격은 감정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밖으로 내지 못하고 안으로 꾹 눌러 두는 거예요. 사람은 서로 소통하고 감정을 나눠야 행복해지는데, 그걸 또 스스로가 막고 있으니까 답답하고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술 한 잔 마시면 말 없는 사람이 말이 많아집니다. 「감정을 표현하면 안 돼」 하고 스스로 금지하고 있던 것이, 술이 감각을 마비시키니까 풀어져요. 풀어지면서 일순간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술만이 아니라, 평소의 자기를 벗어나는 모든 일탈이 이런 식입니다. 마음속에 뭔가 환기가 돼요. 그래서 오히려 억압을 많이 할수록 이 일탈을 많이 필요하게 돼요.

앞에서 본 「나는 똥이야」 하는 믿음도, 감정을 꾹 눌러 두는 성격도 모두 어린 시절 양육의 환경 속에서 굳은 것이에요. 둘 다 삶을 괴롭고 답답하게 만듭니다. 알고 보면 중독은, 이런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짧은 시간에 자기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그 무엇을 찾은 겁니다.

고통은 그대로인데 중독이라는 진통약만 먹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래서 중독을 없애려면 「중독을 하지 마라」 하고 말하는 게 답이 아닙니다. 중독은 마음의 고통을 잠시 멎게 해 주는 진통약이에요. 내 고통이 진짜로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 근원을 알아야 해요. 앞에서 본 대로, 어린 시절에 굳은 그 믿음과 성격이 그 근원이에요. 그 고통이 해결될 때, 이 진통약을 자연스럽게 먹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런데 고통이 계속 있는데 진통약을 먹지 말라고 하면 이 사람은 죽을 가능성이 있어요. 고통은 그대로인데, 잠깐이나마 숨통을 틔워 주던 것마저 없어지니까요. 더 안 좋아지는 선택을 하는 겁니다. 중독도 나쁘지만, 그보다 더 극단적 선택으로 갈 수 있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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