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지혜로는 인생이 풀리지가 않거든요

성경에 보면 사람을 창조할 때 흙으로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하잖아요. 그 생기가 신의 기운이에요. 셀프라고 하는 것은 이 신의 기운을 말합니다. 그러면 나라고 하는 이 나는 무엇일까요. 흙이 아니라 생기입니다. 한마디로 신의 기운이 나예요.

그리고 사람을 빚은 그 흙, 진흙이 자아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본질상 나는 흙인 자아가 아니라 생기인 셀프입니다. 그런데 진흙인 이 자아가 마치 자기가 셀프라고 말해요.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제 자아가 자기가 셀프인 줄 알고 살 때 삶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봅니다.

어른이 되면 무엇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될까요?

아이는 자기가 신이라고 뭐든 자기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요. 아이일 때는 그래도 괜찮아요. 그러다 뜻대로 안 되는 일을 알맞게 겪으면서 그 생각을 차츰 내려놓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자라 어른이 되면서 자아가 셀프를 만나고 그 셀프를 만나면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신, 삶, 인생, 자연 앞에 마음이 겸손해지고 겸허해지는 이 겸손의 단계에 이르는 것, 그게 어른입니다.

삶의 흐름을 무시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고개를 숙이는 건 어른만 할 수 있어요. 고개를 숙이지 못한 사람은 아이처럼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막 바꾸려고 해요. 삶이라고 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거대한 흐름들이 있는데 그 흐름을 무시합니다. 내가 원할 때 결혼해야 되고, 내가 원할 때 밥 먹어야 되고, 뭐든 내가 원할 때 되어야 해요. 그러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왜 내 뜻대로 안 되느냐며 화가 나죠. 다 큰 성인들 가운데 분노와 증오와 우울함을 안고 사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래서예요.

진흙인 자아가 자기가 셀프라고 말한다는 게 실제로는 이런 모습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자아는 자기가 신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거든요.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속마음에서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을 거예요. 왜 인생을 이렇게 만드셨지? 왜 나에게 이런 가정을 주셨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요. 자기가 신보다 잘났다고 여기니 셀프를 들여다볼 이유가 없습니다. 셀프와 접촉하려 하지도 않아요. 셀프가 신의 기운이니, 신에게 묻지 않고 신과 접촉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 뜻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열심히 사는 신앙이 어떻게 율법이 될까요?

자아는 자기 방식대로 삽니다. 이렇게 살아봐야지, 저렇게 살아봐야지 하면서요.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신앙생활이 좋은 거야, 저렇게 해야 신앙이 좋은 거야. 알고 보면 다 자아가 자기 방식대로 우리를 끌고 온 겁니다.

열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분들이 있어요. 신앙생활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자기 안에서 셀프와 접촉이 안 됩니다. 셀프가 알려주는 지혜를 따르지 않고 자아가 세상적인 처세 방식을 모토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셀프의 지혜 대신 자아의 생각이 들어섭니다. 이렇게 살아야 옳은 사람이고 이렇게 살아야 거룩한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요. 이게 이제 율법이에요. 꼭 지켜야 하는 법이 되는 거죠. 자아의 생각으로는 세상이 가르쳐 준 것을 잘 지켜야 자기가 빛나고 잘나고 거룩해지거든요.

그럴듯하게 뭔가 되는 것 같은데, 결국은 어떻게 될까요?

자아는 현실을 살아가는 기능을 하니까, 자아의 방식으로 끌고 가도 어느 정도 그럴듯해요. 뭔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계속 넘어져요.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라면 계속 재발하고 넘어지고 그게 반복됩니다. 인생도 그렇잖아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같은 상황이 벌어지죠.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고, 신앙심도 좋아지려고 했고, 거룩하게 살려고 했는데 또 안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봤지만 마음속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지 않아요.

작은 지혜로 풀리지 않는 인생은 무엇으로 풀까요?

중독에서 회복해 가는 과정은 여러 단계로 되어 있는데 그 첫 단계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고백이 있어요. 나는 중독에 무력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고백이에요. 이 고백은 자아의 자원이 고갈됐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아의 자원은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려는 자아의 방식이에요.

자아는 결국 삶에 부딪힙니다. 내 지혜로 살아봤는데 이게 풀어질 수가 없네, 하게 되는 거예요. 삶의 고단함, 삶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은 인간적 지혜로 풀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 자체가 단편적이고 굉장히 편협하거든요. 그렇게 좁은 생각 속에서 그나마 살아보려고 버둥거리면서 만들어 낸 것이 작은 지혜예요. 큰 지혜를 가지고 풀어야 인생을 풀어가지, 작은 지혜로는 인생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큰 지혜는 셀프가 알려주는 지혜, 곧 신의 지혜예요.

뺨을 한 대 맞으면 작은 지혜는 무엇을 계산할까요?

그러면 그 작은 지혜는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요.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계산입니다.

저는 성경이 역설적이라고 인간의 생각과 거꾸로 간다고 자주 말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해야 나한테 이익이겠다,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경은 대부분 반대로 말하거든요. 아니다, 네가 이렇게 해야 이익이 있다고요. 희생해라, 주라, 용서하라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인간 세상으로는 용서하는 게 내가 손해보는 일이거든요. 뺨을 한 대 맞았는데 용서하라고 합니다. 내가 용서해 버리면 내가 한 대 못 때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건 손해보는 일인데 용서하라고 그래요. 그런데 성경은 용서가 나한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거죠.

좋은 길을 안내받아도 왜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나한테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방식들은 거의 대부분 오히려 나한테 해를 가져옵니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되갚아야 이익이라고 여기는 것처럼요.

상담에서 안내해 드리는 길은 다 유익하고 행복해지는 길일 텐데, 사람들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아요.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을 하지 않는 거예요. 육신의 생각, 곧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 손해본다는 느낌을 갖는 거죠.

중독과 상처가 어떻게 축복이 될까요?

자아를 가지고 계속 바둥바둥거리며 살다가 죽는 사람이 사실은 대부분이죠. 참 자유와 참 진리를 맛보지 못하고 나름 노력하면서 살다가 가는 거예요. 그런데 중독이 되어서 상처가 있어서 그걸 해결해 보려다가 오히려 참 진리를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면서 지혜를 찾고 진리를 찾아요. 그렇게 더 깊이 깊이 찾다가 진리를 만나면 진정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해방에 이르려면 지나야 하는 대목이 있어요. 자아가 가지고 있던 자기 삶의 방식을 두고 정말 똥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똥덩어리였구나 하고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인정이 될 때, 그때서야 신의 지혜를 받아들이게 돼요. 인정하지 않는 한, 자아는 자기가 신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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