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나라고 하는 이 나는 무엇일까요. 흙이 아니라 생기입니다. 자아는 진흙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문제는 진흙인 이 자아가 마치 자기가 셀프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비유는 사람이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값진 것이 있다는 쪽이 아니라, 그 값진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느냐는 쪽을 가리킵니다. 셀프가 어떤 자리인지는 「엄마 자리를 하나님으로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에 썼습니다. 여기서는 그 자리를 진흙이 차지하고 앉았을 때 삶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봅니다.
어른이 되면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아가 셀프를 만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셀프를 만나면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신, 삶, 인생, 자연 앞에 마음이 겸손해지고 겸허해지는 이 겸손의 단계에 이르는 것, 그게 어른입니다.
흐름을 무시하면 분노가 남습니다
고개를 숙이지 못한 사람은 반대로 갑니다. 삶이라고 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거대한 흐름들이 있는데 그 흐름을 무시해요. 내가 원할 때 결혼해야 되고, 내가 원할 때 밥 먹어야 되고, 내가 원할 때 되어야 합니다. 그러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화가 나죠. 많은 성인들이 분노와 증오와 우울함을 안고 사는 자리가 여기예요.
여기서 자아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내가 신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자아거든요. 그러니 셀프를 들여다볼 이유가 없습니다. 묻지 않고, 접촉하려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이게 이제 율법이에요」
자아는 자기 방식대로 삽니다. 이렇게 살아봐야지, 저렇게 살아봐야지 하면서요.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신앙생활이 좋은 거야, 저렇게 해야 신앙이 좋은 거야. 알고 보면 다 자아의 방식대로 자기를 끌고 온 겁니다.
열정적으로 열심히 사는 분들이 있어요. 신앙생활도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자기 안에서 셀프와 접촉이 안 됩니다. 셀프와 접촉이 안 됐다는 것은 자기 안의 지혜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 자리를 자아의 개념이 채웁니다. 이렇게 살아야 옳은 사람이고 이렇게 살아야 거룩한 사람이다. 이게 이제 율법입니다. 세상이 가르쳐 준 그것을 잘 지켜야 자기가 빛나고 잘나고 거룩해진다는 거예요.
그럴듯하게 뭔가 되는 것 같은데
자아는 현실의 기능을 하는 쪽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방식으로 끌고 가도 어느 정도 그럴듯해요. 뭔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안 됩니다. 계속 넘어져요.
재발하고 넘어지고 반복됩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같은 상황이 발생하죠(「나는 왜 늘 결정적인 순간에 걸려 넘어질까」). 더 나아지려고 노력했고, 신앙심도 좋아지려고 했고, 거룩하게 살려고 했는데 또 안 됩니다. 그렇게 막 살아봤지만 자기 내면의 진정한 자유는 생기지 않아요.
작은 지혜와 큰 지혜
회복 프로그램의 첫 고백이 내가 중독에 무력했고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자원이 고갈됐다는 말이에요.
결국 삶에 부딪힙니다. 내 지혜로 살아봤는데 이게 풀어질 수가 없어요. 삶의 고단함, 풀리지 않는 그 일들은 인간적 지혜로 풀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 자체가 단편적이고 굉장히 편협하거든요. 그 안에서 그나마 살아보려고 버둥거리면서 만들어 낸 것이 작은 지혜예요. 큰 지혜를 가지고 풀어야 인생을 풀어가지, 작은 지혜로는 인생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큰 지혜는 참 셀프가 알려주는 그 지혜예요.
뺨을 한 대 맞았는데
그러면 그 작은 지혜는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요.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계산으로 생겼습니다.
저는 성경이 역설적이라고 자주 말합니다. 무엇과 역설적이냐 하면 인간의 생각과 역설적이에요. 사람은 이렇게 해야 나한테 이익이겠다,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경은 대부분 반대로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이렇게 해야 이익이 있다고요. 희생해라, 주라, 용서하라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인간 세상으로는 용서하는 게 내가 손해보는 일이거든요. 뺨을 한 대 맞았는데 용서하라고 합니다. 내가 용서해 버리면 내가 한 대 못 때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건 손해보는 일인데 용서하라고 그래요. 그런데 용서가 나한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거죠.
유익한 길을 손해로 계산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우리가 나한테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방식들이 나한테 해를 가져옵니다.
상담 자리에서 안내받는 길도 그렇습니다. 다 유익하고 행복해지는 길일 텐데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아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을 하지 않는 거예요. 육신의 생각으로는 그 손해본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유익을 몰라서도 아니고, 무엇을 믿느냐가 달라서도 아닙니다. 계산이 먼저 답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가지고 계속 바둥바둥 걸으면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 사실은 대부분이죠. 참 자유와 참 진리를 맛보지 못하고, 나름 노력하면서 살다가 가는 거예요. 그런데 중독이 되어서, 상처가 있어서 그걸 해결해 보려다가 오히려 참 진리를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하면서 더 깊이 깊이 찾다가요. 그래서 그 고통이 오히려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지나야 하는 대목이 있어요. 자아가 가지고 있던 자기 삶의 방식을 두고 정말 똥이었구나,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틀렸구나 하고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진흙이 진흙 자리로 내려앉는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