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일의 감정이 무기력으로 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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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전에 힘들었던 일을 물으면 아무렇지 않다고 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별일 없는 날에도 몸이 무겁고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그 일을 겪으며 느낀 두려움과 분노까지 함께 눌러 두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을 눌러 두면 힘도 함께 떨어집니다.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면 감정도 끝난 걸까요?

억압은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나 생각이 떠오르지 않도록 밀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일어났던 일을 잊어버리려 하거나,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 버리는 식입니다. 그 순간에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당장 해야 할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을 잊었다고 감정까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눌린 채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건은 멀어진 것 같은데, 몸이 무겁고 무기력한 상태는 남을 수 있습니다.

감정을 누르면 무엇까지 함께 약해질까요?

사람은 슬픔만 골라서 끄기 어렵습니다. 울음이 올라올 때마다 참고, 분노가 생길 때마다 없던 일로 만들면, 슬픔과 분노만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까지 감정을 느끼는 마음 전체가 무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즐거운 일을 만나도 별로 즐겁지 않고 하고 싶은 마음도 잘 생기지 않습니다.

슬프든 기쁘든 감정은 우리를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를 눌러 두고 지내면 힘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지고,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게 됩니다.

감정은 지금 내 상황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안전을 확인하게 하고, 분노는 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려주며, 슬픔은 잃은 것을 인정하게 합니다. 신호를 계속 끄면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차리는 힘도 약해집니다.

눌러 둔 감정은 왜 상관없어 보이는 순간에 나타날까요?

안 느끼려고 눌러 둔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전 일과 상관없어 보이는 순간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불쾌하게 만듭니다. 아이의 작은 실수에 큰소리를 내거나, 가벼운 농담이 하루 종일 마음에 걸리거나, 쉬는 날에 몸이 축 처지는 식입니다. 지금 일어난 일에 비해 반응이 훨씬 크다면, 예전에 눌러 둔 감정이 함께 올라온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 일의 감정은 그 일이 있던 때에 들었던 말투, 보았던 표정, 그때의 상황과 함께 묶여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만난 일이 겉으로는 예전 일과 상관없어 보여도 말투나 표정, 상황 가운데 어딘가가 그때와 비슷하면 그때의 감정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럴 때 나오는 반응에는 지금 일에 대한 감정과 예전 일에서 남은 감정이 함께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눌러 둔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감정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일이 괜찮았다고 넘기거나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때로 돌아가 그 일을 다시 겪으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때 나는 무서웠다’, ‘도움을 받지 못해 화가 났다’처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고, 그렇게 느낀 것이 당연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이렇게 말로 구분하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슬픔에는 잃은 것을 충분히 슬퍼하고 떠나보내는 애도가, 분노에는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나를 지키는 일이, 두려움에는 지금 내가 안전한지 확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유를 몰랐던 무기력 밑에 슬픔과 분노와 두려움이 눌려 있었다는 것이 보이면, 그것을 하나씩 다룰 수 있습니다.

무기력이 오래가면 지난 일보다 무엇을 먼저 살펴야 할까요?

수면과 식욕이 크게 달라지고, 일상생활을 해내기 어려워지며, 즐거움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된다면 억압만으로 설명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울증과 신체 질환, 먹고 있는 약이나 술의 영향도 확인해야 하므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힘들었던 일을 잊으려고 애쓴 것은 그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제는 억지로 기억을 파헤치는 일보다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지금 몸에 나타나는 반응과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몸이 무겁다’, ‘화가 난다’처럼 말입니다. 그때의 일이 흐릿하게만 기억나더라도 지금 느끼는 어려움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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